티스토리 뷰

일상

우리나라 뛰어난 군주, 세종대왕 업적

우주세계여행 2017.01.26 10:34



우리나라 뛰어난 군주, 세종대왕 업적


세종대왕 에 대해서 잘 알지못해서, 업적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손꼽자면 단연코 대왕 세종을 꼽을겁니다. 세종의 성은 이, 휘(이름)는 도, 본관은 전주 입니다.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세종대왕이 다른 세자들과 달랐던점은 어려서부터 책을 곁에 끼고 살았으며, 어느날은 눈병이 났어도 책에서 손을 놓지 못하자 태종이 책을 강제로 뺏었다고 합니다. 이후 태종8년(1408년)에 충녕군에 봉해지고, 태종12년에는 대군으로 진봉하게 됩니다. 그리고나서 몇 년뒤 첫째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페위됩니다. 

 

이미 왕은 세종(충녕대군) 으로 졍해졌다.

  이당시 양녕대군은 어느날 밤 ‘태종’과 ‘원경왕후’의 대화를 엿듣게 됩니다. 그 내용은 셋째 아들 충녕대군의 자질이 뛰어나지만 셋째 아들이라 아쉽다고 예기하는 내용을 엿듣게 됩니다. 원경왕후 역시 태종의 주장에 동의하였습니다. 그 뒤로 어느날 양녕대군은 술을 잔뜩 마시고 효령대군을 찾아갔습니다. 양녕은 효령에게 '공부해봐야 소용없다' 고 말했습니다. 이는 부왕의 뜻이 충녕대군에게 있으니 괜한 마음을 먹지 말라고 했다는 야사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에 크게 실망한 효령대군은 매일 북을 치게됩니다. 여느 스님과 달리 팔에 힘이 들어가 북 가죽이 늘어질 정도로 세게 쳤다. 결국 충격을 견디지 못한 효령대군은 모든 공부를 중단하고 출가하여, 합천 해인사로 들어가 불교에 전념하게 됩니다. 


충녕대군(세종대왕)은 1418년 첫째 형 양녕대군이 왕세자에서 폐위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고 얼마 후 부왕의 선위(왕위를 물려줌)로 즉위하게 됩니다. 즉위 초반 4년간 부왕 태종이 대리청정을 하며 국정과 정무를 주관하게 됩니다. 이후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김종서, 맹사성 등을 등용하여 정무를 주관하였습니다. 이 통치체제가 훗날 일종의 내각 중심 정치제도인 의정부서사제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세종대왕은 유교 정치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세종은 신분에 상관없이 능력있는 유능한 인재들을 많이 등용했고, 깨끗하고 참신한 정치를 펼쳐 나갔습니다. 하지만 인사와 군사에 관한 일은 세종 자신이 직접 처리함으로써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의 행사를 오례에 따라 유교식으로 거행 했으며, 사대부에게도 주자가례의 시행을 장려하여 유교 윤리가 사회 윤리로 자리 잡게 만들었습니다. 이밖에도 사대사고를 정비하고, ‘삼강행실도’, ‘효행록’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였습니다. 반면 불교에 대해서는 초기에는 억압 정책을 썼지만, 말년에는 내불당을 지어 불교를 독신하고 승과를 설치하는 등, 억압 정책을 완화했습니다.


세종의 대외 정책

  세종은 명(明)과의 외교에서 금,은 세공을 말과 포(布)로 대신하는 합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여진과의 관계에서 최윤덕과 이천에게 압록강 상류지역에 4군을, 김종서와 이징옥에게 두만강 하류지역에 6진을 설치하도록 하였습니다.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초기에 삼포 개항 등의 회유책을 썼지만 상왕 태종의 명령 으로 대마도를  무력으로 정벌하였습니다. 정벌 중, 사령관 이종무의 실책으로 조선의 피해가 많아서 실질적으론 이득을 본 승리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대마도 도주가 조선 정부에 항복하여 조공할 것을 약속하였기 때문에 이득이 없었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이종무는 정찰대 선발을 뽑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였고, 결국 사기가 떨어져 선발로 나간 정찰대 중 수백명이 왜병의 기습에 죽고맙니다. 대마도 정벌 이후로 다행히 조선 앞바다는 얼마간 왜구로부터 잠잠해질 수 있었습니다.


조선 세종의 국방 정책

  세종이 책을 좋아하여 학문적으로 국가의 내정을 주로 융성했다고 생각했지만, 학문적인 사업은 물론이고 국토 개척과 확장을 통하여 국력을 키우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왜구 문제의 경우 처음에는 회유책을 써서 평화적 해결을 모색했으나, 당시 일본 정부의 무로마치 막부의 전국 통제력도 완벽하지 않아서 왜구의 남해안 노략질은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1419년에도 왜구가 침입하자 그해 음력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을 삼도 도절제사로 삼아 그로 하여금 삼도에 소속된 9명의 절제사들과 전함 227척, 군사 1만 7천 명을 이끌고 거제도의 마산포를 떠나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정벌하게 하였습니다. 대마도에 상륙한 조선군은 섬의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왜구를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렇게 보름쯤이 지나자 대마도의 도주가 항복을 선언 하였습니다. 이때 이종무는 왜구에게 잡혀 갔던 조선 사람과 함께 붙잡혀 있던 명나라 사람들도 구출하였습니다. 


  조선군은 대마도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켜 1420년 대마도를 경상도에 편입시킬 것이라고 대마도 도주에게 통보했습니다. 그 뒤로 조선은 3포를 개항(1426년)하고, 계해약조(1443년)를 통해 세견선 50척, 세사미두 200석으로 대마도의 무역을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이 왜구를 너그럽게 포용함고 노략질을 근본적으로 방지하는 정책이었습니다. 실제로 이같은 정책덕분에 오랫동안 왜구의 침입이 없어졌습니다.


  1433년에는 압록강을 넘어 파저강 전투에서 여진족을 물리쳤고, 1443년에는 북방 이민족인 여진족에 대한 강경책과 영토 확장에 대한 일환으로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으로 하여금 여진족을 토벌하여 평안도의 4군과 함길도의 6진을 개척하게 하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세종대왕의 가장 큰 업적, 훈민정음 창제

  먼저 세종대왕은 1420년 중앙 집권 체제를 운영하기 위해, 학문 연구 기관 및 국왕의 자문 기관인 집현전을 궁중 안에 설치하여 그들을 일반 관리 이상으로 우대하였습니다. 

  1443년이 되어서 우리나라의 고유 문자가 없음을 안타까워한 세종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정창손, 이개 등의 집현전 학사들에게 명하여 언어를 연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세종은 문자 연구를 위해 그 당시 중국 명나라의 뛰어난 언어학자인 황찬을 만나려고 했지만, 어떤 이유인지 명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허용하지 않아서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짓고 요동에 귀양 가게 되자, 곧바로 신숙주 일행은 그를 만나 13회에 걸쳐 요동과 조선을 직접 왕래하면서 음운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습니다.

세종은 한자를 모르는 백성들인 16세기 지방 하층민도 한글 사용하게 하였고, 암클, 언문등으로 불리우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주시경 선생에 의해서 한글로 정리되고 발전되어 지금의 대한민국과 북한의 기본문자로 쓰이고 있습니다.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창제 덕분에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로 쉽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종대왕의 업적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이때 훈민정음의 창제를 반대한 신하가 있었는데, 그 신하는 최만리와 하위지 였습니다. 


세종의 국정분담

  세종은 뛰어난 통치력으로 원활히 국정을 운영하였지만, 건강이 안좋아서 세 명의 정승에게 조정의 대소사 업무를 나누어 맡아보게 하였습니다. 황희는 주로 인사, 행정, 군사 권한을 맡았고 맹사성은 교육과 제도 정비, 윤회는 상왕 태종과의 중개자 역할과 외교 활동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과거 시험은 맹사성과 윤회가 분담하여 맡았습니다. 나중에 김종서가 재상의 반열에 오를 때쯤에는 국방 업무는 김종서에게 맡겨서 보좌하게 하였습니다.

과거 맹사성과 황희는 같은 입장을 취하면서도 서로 다른 뜻을 품었습니다. 황희가 분명하고 강직한 성격이었다면, 맹사성은 어질고 부드럽고 섬세했습니다. 또 황희가 학자적 인물이었다면 맹사성은 예술가적 인물이었습니다. 윤회 역시 예술가적인 특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세종은 이런 재상들의 재질과 능력을 보고 적합한 임무를 분담하여 맡겼습니다. 황희는 주로 이조, 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적합했고, 맹사성은 예조, 공조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맞았으며 윤회는 외교와 집현전 쪽을 주로 맡아보았습니다.

 

 세종은 부드러움이 필요한 부분은 맹사성에게 맡기고, 정확성이 요구되는 부분은 황희에게 맡겼습니다. 따라서 황희는 변방의 안정을 위해 육진을 개척하고 사군을 설치하는 데 관여, 지원하기도 했고, 외교와 문물 제도의 정비, 집현전을 중심으로 한 문물의 진흥 등을 지휘 감독하는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이에 반해서 맹사성은 음률에 정통해서 악공을 가르치거나, 시험 감독관이 되어 과거 응시자들의 문학적, 학문적 소양을 점검하는 일을 주로 맡았습니다. 맹사성과 비슷한 윤회에게는 주로 외교 업무와 상왕 태종과의 매개자 역할, 외교 문서의 작성과 시험 감독관 등의 업무가 부여되었습니다. 이렇게하면서 세종대왕은 이들 재상들의 능력을 알면서도 권력남용의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모든권한을 넘겨주지 않았습니다. 각각의 재상들은 맡은 분야와 업무를 서로 의논하거나 서로 공유하기도 했습니다. 맡은 역할과 성격을 떠나 이들은 모두 공정하고 공과 사를 명확하게 구분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세종의 의정부 서사제

  과 소갈증(당뇨병) 등, 각종 성인병을 앓던 세종은 앞서말했던 것 처럼 맹사성, 황희, 권진, 김종서 등의 재상들에게 일정 부분의 권한을 위임하여 대신 정무를 주관하게 했습니다. 세종은 6조의 관료들이 병권과 인사권 외의 정무를 의정부 정승들의 의결을 거쳐 왕에게 전하게 하는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합니다. 그런데 세종이 의정부 서사제를 실시한 표면적 이유는 건강 때문이었습니다. 세종은 비만한 체구에 운동은 싫어하면서 책을 읽기 위해 더욱더 움직이지 않고 게다가 고기등의 육식을 즐겨 먹었기 때문에 종기,소갈증,풍질,안질 등을 평생 앓았습니다. 그러나 세종이 왕권의 상당 부분을 의정부로 옮기도록 결심한 이유는 영의정이 황희 때문이었습니다. 영의정 황희는 여비들의 다툼에 ‘네 말이 옳고, 네 말도 옳고, 또 네 말도 옳다’고 했고, 종의 자식들이 수염을 잡아당겨도 웃었다는 일화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황희는 오랫동안 관직에 있었으므로 처세술에 능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황희는 어떤 젊은 성균관 유생이 길에서 자신을 향해 "정승이 되어서 임금의 그릇됨을 잡지 못한단 말이냐" 라고 면박하자 도리어 기뻐했다고 '연려실기술'에 실려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후 18년 동안 황희는 명재상으로서 세종을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로 이끌다가 1449년(세종 31년) 87세로서 은퇴하였습니다. (황희 정승은 그뒤로 3년을 더 살아 1452년에 사망하였습니다.)

  세종대왕 시대의 또다른 정승 맹사성은 청렴한 관료였지만 자신의 의견이나 개성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세종은 맹사성 역시 적극 신뢰하여 황희, 권진과 함께 그를 중용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종 후반기에는 황희 등이 천거한 김종서 등을 재상으로 중용하여 정사를 맡기기도 했습니다.


세종시대의 ‘처녀 조공, 금은 조공’ 일시 중지

  고려가 멸망한 이후에도 조선에서는 계속 중국으로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을 보냈습니다. 처녀 조공은 처녀 진헌이라 불렀는데 부왕 태종대에는 진헌색이라는 기관을 설치했습니다. 그러나 태종 때의 처녀 조공은 40명이었지만 세종 12년까지 명나라에 조공으로 바쳐진 공녀는 74명이었습니다.

  태종때에 이미 태종은 명나라에 사정하여 조공을 중지시켜달라고 요청하였지만 명나라는 이를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금,은 광산에서 지나치게 많은양을 채굴하다가 산사태 등이 발생하였고 많은 양의 국부가 유출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나서 세종 즉위 후 1430년(세종 12년)까지 74명의 공녀가 명나라에 바쳐졌습니다.

세종은 즉위 직후부터 여러 차례 명나라에 친서를 올려 처녀 진헌과 금은 공물로 인한 부담이 심한 것을 들어 명나라에 조공을 면제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세종의 계속된 조공 면제 요청은 1430년(세종 12년)에 말과 명주, 인삼 등 다른 공물을 더 보내는 조건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이로써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면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세종 사후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다시 부활했고, 처녀 조공과 금은 조공은 중종 때에 가서야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세종시대과학의 부흥

  세종은 정인지, 정초, 이천, 장영실 등에게 명하여 천문 관기구인 간의, 혼천의, 혼상, 일성정시의(1437년, 천문 기구 겸 시계), 해시계인 앙부일구와 물시계인 자격루, 누호 등 백성들의 생활과 농업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과학 기구를 발명하게 하였습니다. 또 세종은 궁궐에 일종의 과학관이라 할 수 있는 흠경각을 세우고 과학 기구들을 설치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고금의 천문도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으며, 이순지와 김담 등에게 명령하여 주변국의 역법을 참고로  역서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편찬케 하였습니다. 이 덕분에 독자적으로 역법을 계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후에 이순지는 천문, 역법 등에 관한 책인 ‘제가역상집’을 편찬하였습니다.


  태종 때 제작되었던 기존의 청동 활자인 계미자가 글자의 형태가 고르지 못하고 거칠다는 단점이 발견되자, 세종은 1420년에 경자자, 1434년 갑인자, 그리고 1436년 병진자 등을 주조함으로써 활판 인쇄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으며, 서적 편찬에 힘썼습니다. 1431년과 1446년에는 아악의 음률을 정하는 기준으로 쓰던 구리관인 황종관을 표준기로 지정하여, 그 길이를 자(尺)로 삼고 담기는 물을 무게의 단위로 삼도록 함으로써 조선의 도량형을 확립시켰습니다. 또한 천자총통, 지자화포와 같은 신무기를 개발하는 것은 물론 총통의 제작 및 사용법에 관한 책인 ‘총통등록’을 편찬했습니다.


문물의 발전을 이룩하다.

  세종은 관습도감을 두어 박연으로 하여금 제례 때 사용하는 중국의 음악이었던 아악을 정리하여 향악과 조화롭게 결합시켰습니다. 또한 새로운 음악에 맞춰 새로이 편경과 편종등의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으며, 정간보를 통해 이 음악을 기록케 하였습니다.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의 ‘용비어천가’, 정초,변계문의 ‘농사직설’,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 설순의 삼강행실도, 윤회,신장의 ‘팔도지리지’, 이석형의 ‘치평요람’, 수양대군의 ‘석보상절’, 김순의,최윤 등의 ‘의방유취’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습니다.

또 한편으로 농업과 양잠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의 주조, 전제상정소를 설치하고 공정한 전세제도의 확립 등으로 경제 생활 향상에 전력했습니다.


세종의 법전 정비

  세종은 즉위했을 당시부터 법전을 정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세종 4년에 완벽한 ‘속육전’의 편찬을 목적으로 육전수찬색을 설치하고 법전의 수찬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수찬색은 세종 8년 음력 12월에 완성된 ‘속육전’ 6책과 ‘등록 謄錄’ 1책을 세종에게 바쳤고,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 6권과 ‘등록’ 6권을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도 개수를 계속하여 세종 17년에 이르러 일단 ‘속육전’ 편찬사업이 완결되었습니다.


세종의 서민 복지 정책

  세종은 복지정책으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이나 남편을 잃은 여자 등 약자들에게 담당 관사에서 쌀을 지급해주도록 했고, 장애인과 노인에게는 세금을 면제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장정을 한 명씩 내주어서 봉양을 하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세종은 시각장애인 복지정책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그 예로 유명한 시각장애인 점복가에게 1435년 벼슬을 준 일이 있습니다. 세종은 “지화가 국가의 미래를 점치는 일과 왕실 혼인에 자주 참여하여 점복을 잘 치니 벼슬을 내리는 것이 어떠냐”고 정승 황희와 맹사성에게 물었습니다. 황희가 정4품으로 한정하자고 제안하여 시각장애인 점복가 지화와 이신에게 벼슬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사간원에서 반대한 것을 세종은 사옹원의 벼슬은 문제가 없다고 하였으며, 이것이 정당하다고 신하들을 설득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한편 시각장애인 독경사는 명통시에서 활동했는데, 명통시는 시각장애인단체로 장애인에게 쌀, 황두를 지원했습니다.


  크게 여러가지 세종대왕의 업적을 적어보았습니다. 이밖에도 다양한 업적이 있었겠지만, 희대의 명 군주 였던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병이 많아 그 능력을 전부 발휘하지 못한것같아 아쉬움이 조금은 남습니다. 사람에게 운동은 필수적인 조건 인가봅니다. 게다가 그당시 임금의 위치에서는 얼마나 많은 끼니를 먹었는지 생각해보아야 할 듯 합니다. 지금은 아침,점심,저녁 으로 먹지만, 당시 왕의 수라상은 하루에 5끼니나 된다고 합니다. 아침의 초조반, 아침수라상, 점심의 낮것상, 저녁수라상, 밤중에는 야참까지, 게다가 고기를 즐겨먹었다고 하니, 건강에 문제가 오지않는게 이상할정도 입니다. 그리고 왕의 수라상에는 기본으로 12첩 반상이라해서 12가지 종류로 반찬을 내온다고 하니 정말 왕은 왕인가 봅니다.


  결국 세종대왕은 1450년 54세의 나이로 사망하게됩니다. 당시에는 소갈증, 합병증, 중풍 등으로 고통받으며 승하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안타깝게도 세종의 뒤를 이은 맏아들 문종 조차 병약해서 1450~1452년, 2년 동안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후 문종도 1414~1452년 38세의 나이로 사망하게 됩니다. 그뒤로 조선은 귀신같이 언제 태평성대 였냐고 묻는듯이 수양대군이 1453년 계유정난을 계기로 권력을 잡게됩니다. 바로 이 수양대군이 훗날 세조가 됩니다.


  이번에 세종대왕의 업적을 살펴보면서 참, 동양과 같은 상하구조의 문화에서는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이 마음에 너무 와 닿았습니다. 지금 현대에 들어서도 경직된 상하 구조적 문제를 많이 문제삼고 있지만, 뿌리깊게 박혀있는 문화 때문에 쉽게 해결될 것 같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회사들은 영문이름으로 서로 부르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제 곳 새로운 대통령이 나올탠데 좋은 대통령이 뽑혀서 우리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댓글
댓글쓰기 폼